사당패와 사찰과의 관계
사당패와 사찰과의 관계
  • 시사안성
  • 승인 2018.07.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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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7
일제 강점기 남사당 놀이
일제 강점기 남사당 놀이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사당이라는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 이는 사당이란 절에 기거를 하지만 중이 아닌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근엄한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 사당패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경제적으로 상호 공생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당패들이 마을에 공연을 갔을 때 허가 받는 것을 곰뱅이트기라고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그들의 후예이자 같은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의 예를 통하여 유추해 보도록 하겠다.

남사당패의 경우 그들이 마을에서 공연하기 위하여 시도하는 곰뱅이트기에서 성공 확률은 약 30%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빈촌에서 집집마다 고사반(告祀盤)을 차리고 공연단의 숙식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남사당패들이 시골 마을에서는 곰뱅이를 트는 자체가 어렵고, 설령 곰뱅이를 터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오면 보통 이들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분담하여 숙식을 제공하여 주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한 빈가에서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이 부족하거나 가정에서 차리는 고사반을 마련하기 어려운 집에서는 공연기간 동안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였다는 사례마저 있다. 이러한 예는 같은 유랑예인 계통인 사당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지 않은 곰뱅이를 트기 위한 한 방법이 바로 사찰에서 왔다고 하여 신앙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심우성은 사당패들의 경우 자신들의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우며 부적을 판매하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친다고 하였다.

가면극(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
가면극(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

즉 사당패는 부적을 판매하고, 걸립패는 사찰의 신표[문표(文書)라고도 한다]를 제시하고 공연허락을 받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적과 신표의 실제적인 용도는 다르지만, 곰뱅이트기의 경우 공연단이 어느 절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신분증명서로의 역할은 같기 때문에 사당패들도 신표를 들고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사당이 사찰과 관계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일부 중들의 성욕 해소를 위함이다. 사당은 평소에는 거사와 부부관계를 맺고 있지만 사찰의 일부 중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송석하는 사당고에서 사당은 사찰로서도 표면상 경내에 둘 수는 없으나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일부 품행이 단정치 못한 젊은 승려에게는 생리적 위안의 대상도 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단서는 잡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장삼 더 치마젹짓고 염쥬글너 당나귀 밀치호

   셕왕셰계 극낙셰계 관셰음보살 나무아비타불 십년공부 너 갈 로 나긔라

   밤즁만 암거사 품에 드니 염불경이 업셰라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 長衫 더 치마 뎍삼 짓고 念珠 글너 당귀 밀티

釋王世界 極樂世界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十年工夫도 너 갈데로 이게

즁만 암커의 품에 드니 念佛景이 업셰라

가곡원류(歌曲源流)

 

. 長衫 더 치마 赤衫 딧고 念珠란 버셔 나귀 밀치

釋王世界 極樂世界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十年工夫도 너 갈 듸로 니게

만 암거픔에 드니 念佛景 업셰라

청구영언(靑丘永言

 

. 듕놈이 져문 당을 어더 媤父母孝道긔 무어슬 여 가리

松肌佐飯 뫼흐로 치다라 싀억삽쥬 고리 들밧트로 리다라 곰달물숙 게우목 다지 잔다괴 씀바괴 고들박기 두릅鉢囊국게 너허가셰

야 암쇠등에 언치 언져 삿갓 모시長衫 곳갈에 念珠밧쳐 어울고 가리라

청구영언(靑丘永言)

 

. 즁놈이 졈운 당을 어더 媤父母孝道를 무어스로 여 갈고

松起佐飯 뫼흐로 티다라 싱검쵸 삽쥬 고샤리며 들밧흐로 나리다라 곰달늬 물쑥 게우목 다지 쟌다귀 고들이 두루 아 바랑국게 너허가셰

上座야 암등에 언티노아 삿갓 모시長衫 念珠 밧쳐 어울타고 가리라.

가곡원류(歌曲源流)

 

. 즁놈이 졈은 샤당년을 어더 父母孝道에 긔 무엇슬 야 갈

   松杷편과 더덕片脯 芊椒佐飯 뫼흐로 치아 싀엄취라 삽쥬 고살이 글언 뫼 믈과 들밧트로 이달아 곰릐라 물쑥 게유목 다지와 씀박위 쟌다귀라 고돌

   둘오 야 바랑게 너허 가지

  무어슬 타고 갈어화 다 암쇼 등에 언치노화 새 삿갓 모시長衫 곳갈에 念珠

 밧쳐 어울 고 가리라.

해동가요(海東歌謠)

 

자료 ’, ‘’, ‘는 모두 비슷한 내용이다. 중이 밤중에만 암거사, 즉 사당의 품에 든다는 내용으로 중과 사당이 낮에는 각자의 활동을 하다가 밤에만 같이 동침한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이는 사당과 중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근엄한 사찰 근처가 사당패의 근거지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암거사라는 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당과 거사라는 용어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용어로, 거사패 가운데의 여자 즉 사당을 지칭하는 말이며 거사의 반대개념으로 부른 용어이다.

자료 ’, ‘’, ‘역시 비슷한 내용으로 중이 젊은 사당을 얻어 무엇으로 시부모께 효도를 할까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는 앞의 자료 보다 중과 사당의 관계를 훨씬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중이 젊은 사당을 얻었다고 하는 표현에서, 몰래 하는 관계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같이 산다고 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또 시부모께 효도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며느리로 인정받고 있다고 보이므로, 중과 사당과의 관계는 공공연한 내연관계라고 볼 수 있다.

가면극2(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
가면극2(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

 

그러나 중놈이라고 하는 욕설을 붙인 것에서 보아 이러한 부부관계를 맺는 행동이 당시에도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아주 드문 사례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결국 결혼을 할 수 없는 일부 중들로서는 마치 부인을 맞은 것처럼 성욕해소도 하고,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는 편리한 관계인 것이다.

또 사당패들이 사찰 주위에 분포하는 것은 경제적인 공생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당패들로서는 주민들에게 사찰에서 왔으므로 동냥을 주는 것이 바로 불사(佛事)를 하는 것이라는 대의명분이 필요하였고, 주민들로서도 곰뱅이를 터주고 불사를 한다는 기분으로 공연을 보고 시주도 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찰 측에서도 추후 그 수익의 일정부분을 분배 받음으로써 상호 경제적 필요성을 충족시켰다. 그것은 송석하의 말대로 조선시대 사찰 시주자 명단에 사당과 거사가 자주 보이는 것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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