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초등학교와 동창회 그리고 사은회
안성초등학교와 동창회 그리고 사은회
  • 시사안성
  • 승인 2018.07.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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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4
1948년 선생님들(출처;안성초등학교 100년사 교직원사진자료)필자가 1948년 안성공립초등학교 입학 당시의 선생님들이 학교 건물 정면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남자선생님 23명, 여선생님 8명, 교장 장호선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합계 33분의 교직원이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선생님들(출처;안성초등학교 100년사 교직원사진자료)필자가 1948년 안성공립초등학교 입학 당시의 선생님들이 학교 건물 정면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남자선생님 23명, 여선생님 8명, 교장 장호선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합계 33분의 교직원이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89월이면 안성초등학교 설립 116주년이 된다. 오랜 전통을 가진 초등학교라서 혹시 동문회의 세력인 졸업생 수를 가늠해 볼 수 있을까 해서 기록을 찾아보니 쉽지 않았다.

18957월에 소학교령(6년제)이 제정 공포되면서 근대적인 초등교육이 시작되었으며 안성지역에서는 1902(광무 2) 당시 이종두(李鍾斗) 안성군수가 민간인의 기부금으로 민가(民家)를 매입하여 안성 최초의 근대학교인 사립안성소학교’(초대교장 한국인/李茂年)를 설립하게 된다. 공립이 아닌 사립으로 탄생된 것이다.

소학교령에 의하면 사립소학교의 경비는 설립자 부담을 원칙으로 하되 지방재정이나 국고에서 보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한 실정이니 당시 교사(校舍)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시설 설비도 미비하여 학생 수도 많지 않은 시대였다. 따라서 공립이나 사립이나 소학교들은 학교시설이 보잘 것 없고, 자격 있는 교사도 부족하여 한문 위주의 서당식 교육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그래도 안성사립소학교는 초대교장인 이무년 교장을 중심으로 역사, 지리, 이과 등 새로운 교과 도입을 시도하면서 학교를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사립안성소학교는 일제 강점기인 1906년 통감부의 보통학교령(4년제)에 의해 사립안성보통학교로 개칭되었고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안성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되었다. 다시 193841안성심상(尋常)소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총독부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1946안성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되었다.

1949년엔 공.사립 명칭을 폐지한다는 문교부장관령에 의해 안성국민학교로 개칭되다가 19963월 교육법 개정에 의해 안성초등학교로 명칭이 정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안성초등학교 100년사 참조).

 

동문회의 발자취를 더듬으려면 졸업생 명단을 파악해야 할 것 같다. 116년이나 되는 흔치않은 역사를 지닌 초등학교로서 졸업생을 배출한 기록을 확인해 보니 19103. 25일에 남자 제1회 졸업식이 있었고 19153. 25일엔 여자 제1회 졸업식이 있었다고 나온다. 더구나 졸업생 명단은 파악할 수가 없었고 겨우,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졸업한 제29회 동문회원 9,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에 졸업한 제35회 졸업생 14명이 파악되었을 뿐이다.

다행히 1948년 제38회 졸업생 이후부터는 비교적 동문회원 명단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안성초등학교가 116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해서 무리하게 졸업생 명단을 찾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학교로서 또한 동문으로서 동문회의 역사 이야기를 잠시 흥미 있게 엮어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안성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의 입장에서 보면 116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에만 추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희망마저 잃어버렸던 암울한 일제치하와 민족의 아픔인 6. 25전란의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꿋꿋하게 이어 온 역사의 상징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44회동창회 사무실 현판식 사진(개인 소장)/1992년 4월 경 마련한 한 건물에서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라는 간판위에 友情이라고 장식한 테이프를 걷어내고 있다
44회동창회 사무실 현판식 사진(개인 소장)/1992년 4월 경 마련한 한 건물에서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라는 간판위에 友情이라고 장식한 테이프를 걷어내고 있다

필자는 동문회에 대하여 남다른 애착심을 갖고 있다. 흔히 졸업한 학교를 모교(母校)라고 칭한다. 그리고 모교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그만 큼 인자하신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을 가르쳐준 고마운 학교와 선생님과 동창들에 대하여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마음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80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마음으로 정리하면서 노년을 편히 지내고 있는 일상생활에서 한 달에 한 번 씩 다가오는 초등학교 동창회, 중고등학교 동창회,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는 일정이 기다려지곤 한다. 물론 총동문회에도 가끔 나간다. 동창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총동문회에 나가면 선배도 만나고 후배들도 반갑게 만난다. 또 동료 교직원도 만나고 은사님도 더러 만나서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동창들은 기억마저도 잊고 있었던 추억의 사진 좀 보여 달라 하기도 하고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다시 떠 올려 달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64년도에 들어간 첫 직장이 중고등학교인 모교이다. 19544월에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하던 모교에서 스승님 들이 가르쳐 내보낸 모교는 제자를 직장으로 불러 다시 품어준 모교가 된 셈이다.

같이 근무하는 교직원 중엔 모교 은사님도 계시고 중고등학교 1회 선배, 2회 선배, 4회 선배들이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8회로 졸업한 후배의 처신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더구나 모교 출신 교사끼리 모이는 교직원 친목회에서는 선배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었다.

교사로 재직 중 1967년부터는 모교인 중고등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총무)을 맡아서 1987년까지 20여 년 동안 길게 봉사한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고 틈만 있으면 서무과(행정실)에 내려가 1회부터 졸업한 횟수까지의 학적부를 몇 달 동안 뒤지면서 꼼꼼하게 동문들의 명단을 작성했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총동문회를 조직하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인 44회 동창회도 처음으로 주선하여 묶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이 지났어도 동창들 대부분이 20대 젊은 나이에 생계도 이끌어가야 하고 또 군에 입대해야 하기 때문에 안성지역에 살고 있는 동창들을 10여명 모으기가 어려웠다. 친목회 형식으로 모임을 가지고 지내다가 점점 인원이 많아지고 또 사업도 가지고 있는 동창들의 참여로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해서 몇 십 년이 지나고 서울 친구들은 또 나름대로 재경동창회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꾸준히 모이던 동문들이 안성에 살고 있는 동창들과 합해서 고향인 안성에다가 사무실을 하나 빌려서 1993년도에는 현판식까지 갖게 되었다. 그때 이구동성으로 발의한 안건은 바로 은사님 돌아가시기 전에 수소문하여 사은회를 갖자고 한 일이었다.

44회 동창회 총회 겸 사은회 행사 단체사진(개인 소장)/1995년 5월 14일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 회원이 사은회를 하기 위해 초청한 은사 류치형 선생님내외분(꽃을 달고 계신 분)과 은사 신현복(여) 선생님(꽃 달고 계신 분)을 모시고 모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안성 회원들과 재경 회원들 50여명이 모여서 안성초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총회를 가졌다
44회 동창회 총회 겸 사은회 행사 단체사진(개인 소장)/1995년 5월 14일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 회원이 사은회를 하기 위해 초청한 은사 류치형 선생님내외분(꽃을 달고 계신 분)과 은사 신현복(여) 선생님(꽃 달고 계신 분)을 모시고 모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안성 회원들과 재경 회원들 50여명이 모여서 안성초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총회를 가졌다

드디어 재경동창회와 합동으로 1995514일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두고 모교 강당을 빌려서 은사님 두 분을 모시고 사은회를 열었던 일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모교를 통해서 또는 은사 찾기 운동으로 모두들 많이 모시려고 노력하였으나 졸업한지 41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다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좀 더 일찍 계획을 세웠으면 하고 후회도 해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으리의 노래제목이 되었을 뿐이다.

힘들게 수소문하여 주소지로 찾아갔더니 1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자녀들의 대답을 들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 단지 안성초등하교 교장을 역임하시고 바로 학교 앞에 살고 계셨던 류치형 선생님 내외분과 외지에 살고 계신 신현복() 선생님을 모교 강당 단상에 모실 수 있었고 그 당시 동창회장 자격으로 인사 말씀을 드릴 때는 눈물이 왈칵했던 생각이 난다.

강당에 모인 사은회 참석 44회 동창들 사진(개인 소장)/1995년 5월 14일 가진 총회 겸 사은회 행사장인 안성초등학교 강당에 모여 앉아 은사님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강당에 모인 사은회 참석 44회 동창들 사진(개인 소장)/1995년 5월 14일 가진 총회 겸 사은회 행사장인 안성초등학교 강당에 모여 앉아 은사님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은회 행사에서 신현복 선생님의 인사말씀(개인 소장)/역시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 주관으로 사은회 행사를 하고 있는 강당 단상에서 신현복 은사님이 답사로 인사말씀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은회 행사에서 신현복 선생님의 인사말씀(개인 소장)/역시 안성초등학교 44회 동창회 주관으로 사은회 행사를 하고 있는 강당 단상에서 신현복 은사님이 답사로 인사말씀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를 하기위해 단상에 오른 당시 모교 장동원 교장선생님(개인 소장)/박종권 회장이 교장선생님을 단상으로 모시고 있다
사를 하기위해 단상에 오른 당시 모교 장동원 교장선생님(개인 소장)/박종권 회장이 교장선생님을 단상으로 모시고 있다

당시 모교 장동원 교장선생님의 축사에 이어 제자들의 정성으로 마련한 금반지 닷 돈의 기념품 증정까지 마치고 큰 음식점으로 모시고 가서 큰 절도 드리고 추억의 담소도 기쁘게 나누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엔 인천에 살고 계시다는 공태호 선생님과도 추가로 연락이 닿아서 직접 승용차로 안성까지 모시고 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2년 후에는 필자의 4학년 2반 담임이셨던 박의원 선생님 내외분이 미국에서 마침 안성에 다니러 오셨다가 반갑게 모시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지금은 불과 몇 해 전에 두 분 은사님이 돌아가시어 장지까지 까서 조의를 표하기도 하였으나 살아계셨을 때 사은회를 갖은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필자는 안성초등학교 44회 동문으로써 졸업한 지 48년만인 2002안성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는데 참여한 바 있다. 당시 우리 회기인 44회 동창회 후임 회장이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100주년을 준비하는 총동문회 회장단의 열정도 대단하였다고 생각한다. 200112월에 안성초등학교 35회부터 68회까지 동창회 기수별로 대표들이 안성초등학교 교무실에 모여서 내년, 즉 설립 100주년이 되는 2002년에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전격 합의한 것도 동문들의 각오와 열정이 불꽃 튀는 현장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안성초등학교 총동문회 회칙이 제정된 것은 1992년이다(1대 총동문회장 조동필/전 고려대 정경대학장/안성 미양면 출신). 그동안 각 기수별로 회기별 동창회가 드문드문 존재하였지만 총동문회의 조직으로 단합하려는 태동이 보이기 시작 한 것은 불과 2001년 이었던 것이다. 동문회 임원들이 그때서야 동문회원 주소록을 확인하려니 여간 어려움이 큰 것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19506. 25전쟁 이후의 졸업생인 제 40, 41회 동문들의 명단은 학교 학적부를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졸업생 명단은 전쟁 중 소실되었는지 아니면 19912월 학교 본관 건물 전소로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100년사 부록에 있는 동문회원 주소록을 확인해 보니 1939(29) 졸업생 9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었고 1945(35) 졸업생 명단은 14명의 주소록이 작성되어 있었다.

100주년 기념탑 사진(개인 소장)/안성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행사(2002년 9월)를 기해서 개교 초창기부터 우뚝 서있었던 느티나무 자리에 세워진 거석 기념비 앞에서 100주년 행사를 주관한 총동문회 임원과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기념비에는 국전 서예작가인 류승의 동문의 글씨 “미래를 선도하는 푸른 새싹들의 터전”을 새겨 넣었다
100주년 기념탑 사진(개인 소장)/안성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행사(2002년 9월)를 기해서 개교 초창기부터 우뚝 서있었던 느티나무 자리에 세워진 거석 기념비 앞에서 100주년 행사를 주관한 총동문회 임원과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기념비에는 국전 서예작가인 류승의 동문의 글씨 “미래를 선도하는 푸른 새싹들의 터전”을 새겨 넣었다

 

당시 20025월에 열린 총동문회의 밤기념행사를 주관하느라 고생한 총동문회 유OO 총무는 가장 어려웠던 일은 교정에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기념비로 세울 거석(자연석)을 찾으려고 임원들이 충남 보령에 있는 거문예석전시 현장을 3차례나 답사한 끝에 명품 거석을 거액을 들여 매입하였다고 한다. 100주년 행사 바로 이틀 전 오후 늦게 도착한 20톤이 넘는 기념비석을 대형 크레인으로 세우느라고 밤샘 작업 끝에 드디어 다음날 새벽 6시에 교정에 우뚝 세워진 ‘100주년 기념비를 보고 모두 눈시울이 뜨거운 환호성을 외쳤다고 한다.

안성초등학교 동문회의 활동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물론 현재 각 회기별 동창회는 매우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매년 총동문회 행사도 열고, 시내 곳곳에 회기별 동창회 간판이 걸려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문들끼리의 사무실도 운영하기도 하고 또 기금이 몇 천 만원이 넘는 회기도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은사님을 초대하여 사은회를 갖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고향을 찾는다. 나의 어머니 학교인 모교, 그리고 마음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다. SNS에 올라와 있는 어느 학교 동문을 그리워 찾는 모습을 여기 소개해 본다.

 

“OO인 우린 모두 하나” [oo동문 203040 번개]

“50 되기 전(oo회 이후)에 한번 보자 !”

“30 넘었는데 한번 보자 !”

“20대는 ? 무조건 Welcome !!”

1. 일시

2. 장소는 SNS에 최종 공지

신청 및 추천을 원하시는 'OO'께서는 7oo일 까지 ooSNS를 통해 해 주시면 됩니다.

3. 참가비 : 없음

4. 특전 : 20대 참가자 중 5명에게 추첨을 통해 5만원 상품권 지급

좋아요, 댓글달기, 공유하기, 퍼나르기 등으로 독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입시다.” “한 번 다 만납시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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