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문에서도 읽히는 언론의 나쁜 행태- 매일신보 1912년 1월과 2월 기사
옛 신문에서도 읽히는 언론의 나쁜 행태- 매일신보 1912년 1월과 2월 기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7.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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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13
1912년 1월1일 10면 1단
매일신보 1912년 1월1일 10면 1단

191211101總督府公文: 告示, 조선총독부고시 제387, [전화호출지역 추가]

명치 44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 289, 1항중 좌와 같이 추가하야 명치 4511일부터 시행함. 명치 441225일 조선총독부 백작 사내정곡

평택-안성간

1통화시의 통화료 금 15

1회의 전화 호출료 금 10

 

지난호에 소개한 노량진-안성간 전화요금 기사와 같은 종류의 기사다. 조선총독부 고시내용을 그대로 게재했다. 평택과 안성간의 전화요금이 15전이다. 노량진과 안성간의 전화요그이 35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더 비싼 요금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12년 1월 18일 2면2단
매일신보 1912년 1월 18일 2면2단

191211822明年度 土地調査

조선의 일대사업되는 토지조사는 15986,202의 예산으로써 재작년 5월부터 착수하야 이래로 착착 진행중인데 본년도 예산은 1757,246이라, 523분반으로써 수원, 안성, 광주, 대구 경산 방면을 조사하얏거니와 명치 45년도에는 기정년할액은 300여만원의 예산이로되 총독부 내년도 예산 대체의 편제상으로 인하야 약 70만원을 감하야 ...(하략)

 

역시 지난호에 게재했던 것과 같은 토지조사 관련기사다.

1912년 수원, 안성, 광주, 대구, 경산 등의 토지조사 예산으로 1757246원의 예산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안성과 함께 포함된 수원이나 광주, 대구 등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표적인 대도시라는 점이다. 당시 안성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 수원이나 광주, 대구 등과 함께 토지조사를 먼저 조사할 만큼의 위상을 가졌다고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신보 1912년 2월4일 3면2단
매일신보 1912년 2월4일 3면2단

19122432- 屠牛刀殺本夫

안성군 율동면 거하는 황○○의 처 황성녀(黃姓女)는 연금 41세인대 해면 부근 거 38세된 심○○과 잠통하야 빈수상종한다더니 작년 1110일 야에 간부 심○○과 동모하야 도우하는 대도로써 기 본부 황○○를 살해암매한 정적이 자연발각되얏슴으로 거월 27일에 해간부간부를 해지경찰에셔 착수하얏다더라.

 

이 기사는 이 후 314일과 52일에 관련기사가 등장하는데, 나이 등 세부 사항에 있어 변화가 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기사에서는 범행 방법이나 동기, 과정 등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 같으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제재를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기사의 제목도 자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자극적인 제목과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가 많이 읽히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런데 매일신보가 당시 사실상 일제의 관보성격이었음을 감한하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이런 자극적인 기사로 사람들의 관심을 민족이나 나라의 문제에서 관심을 돌리려 했던 못된 행태를 오늘날 답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기사에 등장하는 율동면은 현재의 보개면 지역으로 앞으로의 기사에서는 마을단위까지 나오고, 기사에서는 실명이 모두 공개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자이크 처리했다. 지역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황성녀라는 이름은 그대로 공개했는데 이는 실명이 아니고, 해석하자면 황씨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여자의 이름에 대해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김씨성을 가진 여자의 경우 김성녀로 표현했다.

매일신보 1912년 2월 11일 2면 7단
매일신보 1912년 2월 11일 2면 7단

191221127단 토지조사과장 출장

가옥(家屋)토지조사과장은 재작 8일부터 수원, 남양, 안성, 양성지방의 1필지 측량사무를 시찰하기위하야 출장하얏는데 래 15-6일경에 귀임한다더라.

 

경기도의 토지조사과장이 측량사무를 시찰하기 위해 수원, 남양, 안성, 양성지방으로 출장을 떠났다는 기사다.

매일신보 1912년 2월 24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2년 2월 24일 2면 5단

191222425檜垣장관 관내 순회

회원(檜垣) 경기도장관은 래 26일 오전 630분에 남대문을 출발하야 진위, 안성, 죽산, 음죽, 광주 6군의 각종 시설 급 민정 등 시찰로 인하야 출장할터이라는데 무전, 신미, 서전 이, 각 서기가 수행힌다 하며 일정은 약 9일이라더라.

 

경기도 장관이 각종 시설 과 민정 시찰을 위해 출장하는데 그 안에 안성, 죽산, 등이 포함되었다는 기사다.

경기도 장관의 이 출장과 관련해 191239일 기사에는 경기도 장관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이미지가 그 절반 밖에 없어 전체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무튼 39일 실린 기사 중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의 요지는 장관일행이 출장중 도시락을 휴대해 밥을 먹자 주점에서 밥을 사먹던 사람들이 다음부터는 근검하자고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었다. 오인(경기도 장관)의 행동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기도 장관이 모범적인 행정을 하고 있으니 일반 주민들도 배우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언뜻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훌륭해 보이는 당시 경기도 장관의 행위가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지배를 합리화하고, 복종하게 하려는 세련된 통치행위이고, 언론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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