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의 대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
서예의 대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
  • 시사안성
  • 승인 2018.07.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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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1

오태주(吳泰周, 1668년 현종 9 ~ 1716년 숙종 42)는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이다. 형조판서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폐비 불가상소의 소두(疏頭)로 순절(殉節)한 충신 오두인[吳斗寅, 시호 충정(忠貞)]과 상주황씨와의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태주는 12세 되던 해 1679(숙종 5)에 현종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결혼하여 왕가와 인연을 맺고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지고 광덕대부(1)에 올랐으나 그후 수()록대부(綏綠大夫1)로 승급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해창위 오태주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부마(駙馬왕의 사위)가 되어 의빈부(儀賓府)에 속해 있어 일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으며, 조정의 대소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

단지 왕명으로 외교사절단을 이끌거나 사신의 영접, 왕실 상장례, 왕실 공역(公役:국가나 공공단체의 부역)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활동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때문에 평상시는 시와 서예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부마 중에 이름난 명필가가 많았던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증 정경부인 원주김씨 묘표
증 정경부인 원주김씨 묘표

해창위 오태주 역시 부마로 학문과 경륜을 닦아 관직에 진출해 경세가로 활동할 수 없어 글씨 연습에 주력하였기에 명필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외에 왕실의 특별한 배려와 지원도 그가 명필로 성장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였다.

당시 왕실에서는 왕자와 부마에게 송설체를 기본적으로 익히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또한 왕실에서는 선조(宣祖)께서 조맹부의 글씨를 얻어 궁중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오태주에게 하사하였다.

이는 조맹부의 서법을 익히도록 하려는 뜻에서 부마가 된 오태주에게 서법의 교본으로 하사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창위 오태주는 송설체를 꾸준히 연습하였고, 숙종의 어필을 많이 갖고 이를 연습하였다. 그의 집에 가장(家藏)하여 전해진 것만도 16첩이나 되었다.

해창위는 왕실의 지원 속에 당시 왕실에서 많이 쓰는 송설체를 익혀 일약 당대의 명필가로 궁중의 서사관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청나라에 까지 알려졌다.

김우영 묘표 후면
김우영 묘표 후면

해창위 오태주의 글씨는 조맹부체를 기본으로 하는데 대자(大字)의 경우는 석봉체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소해(小楷)가신묘하고 예서(隸書)에 능했다. 해창위 오태주의 글씨가 당대 명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명사들의 평과 명필임을 확인한 사실을 아래에 열거한다.

김창흡은 해창위 묘갈명에서 오태주가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소해(小楷)가 신묘하다. 국가의 명을 받들어 재궁과옥책, 신판, 유지 등을 많이 썼다.

최창대는 오태주의 글씨에 대하여 서법이 공교(工巧)하여 국가에 흉사나 가례의 일이 있으면 묘지와 옥책을 많이 썼고 이로 인해 구마(駒馬)를 하사받았다

영조 임금의 평 : “오태주의 필법은 격식이 있고하면서 본받고 싶은 필체로 오태주의 것을 일컬었다.

1703(숙종 29)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서 초병(綃屛:비단 병풍)을 구하였는데 부칙사가 오태주에게 동방의 고시 12수를 쓰게 하여 12첩 병풍을 갖고 갔다.

오태주가 각종 왕실의 행사에 서사관(書寫官)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그가 당대의 명필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집자비가 있는 명필은 김생(金生), 한석봉(韓石峯), 김수증(金壽增), 김수항(金壽恒), 엄한붕(嚴漢朋), 송준길(宋浚吉), 김정희(金正喜), 오태주(吳泰周)뿐이다.

이는 오태주가 당대 명필가로 명성을 떨침은 물론 사후에도 높이 평가 받았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태주의 글씨로 알려진 것은 다음 표와 같다.

 

() 오태주(해창위)의 서예작품 일람표

작품명(금석문)

제작년도

비고

오태주명안공주 묘갈

전면 1()

전면 2, 3(집자)

좌면 ()

후면, 우면(집자)

1688년 숙종 14 시립(始立)

1748년 영조 34 추기(追記)

부인과 본인

본인의 것은 집자

오빈(賓羽) 묘표

1689년 숙종 15

종조부

(從祖父)

오숙() 묘표

1690년 숙종 16

조부(祖父)

오두흥(斗興) 묘갈

1701년 숙종 27

본생 백부(伯父)

오두인(斗寅) 신도비

1701년 숙종 27

()

오두인(斗寅) 묘표

1701년 숙종 27

()

상주황씨(斗寅繼配) 묘갈

1705년 숙종 31

()

여흥민씨(斗寅元配) 묘갈

1737년 영조 13

()

원주김씨(斗寅) 묘갈

1737년 영조 13

()

전주이씨(翔配) 묘표

1690년 숙종 16

본생 조부의 계실()

오상() 묘비

 

본생 조부

오사겸(士謙) 묘비

 

증조부(曾祖)

오윤() 묘표

 

9대조

오계종(戒從) 묘표

1704년 숙종 30

8대조

이의당(二宜堂)

1708년 숙종 34

본생 종형 오중주의 집 당호

이세화(李世華) 신도비

1708년 숙종 34

부 양곡과 인현왕후 폐비 불가상소 동참

홍처후() 묘표

1713년 숙종 39

소품(전면대자)

유철증별시비(兪撤贈詩碑)

- 홍명하시(洪命夏詩)

1734년 영조 10

소품(홍명하의 시)

김우명(佑明) 묘표

1747년 영조 23 개립(改立)

현종의 장인(처외조부)

가암유고에 해창위 라기록

김창협(金昌) 비문

근역서화징에 해창위 라 기록

동생 진주(晉周)의 장인

(사돈관계 사장)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창위는 선대조(先代祖)의 비문을 주로 썼다. 이는 효사(孝事)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외에 타인의 청탁으로 글씨를 써준 것은 특별한 인연이 아니면 거의 없다.

다만 이세화신도비, 홍처후묘표, 유철증별시비, 김우명 묘표, 김창협비가 있다.

이세화신도비는 부친 오두인(충정공, 양곡)과 함께 인현왕후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려 생사를 함께 한 인연으로 쓴 것이고, 홍처후 묘표의 전면 대자와 유철 증별시비는 유철이 증별연

에서 받은 시 중에서 시비를 세울 때 홍명하의 시를 쓴 것으로 소품에 불과한 것이다.

김우명 묘표는 현종의 사위인 해창위 오태주가 현종의 장인(처외조)을 위하여 쓴 것이다. 그럼에도 실물자료에는 음기에 해창위가 썼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가암유고에서 해창위 오태주의 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창협 묘표를 쓴 것은 김창협이 해창위의 아우 오진주(吳晉周, 정랑공)의 장인으로 일찍이 충정공의 신도비명 오두인의 원배 여흥민씨 묘갈명, 재취한 계배(繼配) 원주김씨 묘갈명을 지어

준 인연으로 묘표를 써 준 것이다. 그럼에도 음기에는 김창흡(金昌翕)이 지었다는 기록만 있고 오태주가 썼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근역서화징에 오태주 글씨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는 모두 불필요한 청탁을 받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

정경부인 상주 황시 묘갈명
정경부인 상주 황시 묘갈명

해창위 오태주는 부마로서 뛰어난 문사(文士)의 기질이 있었음에도 당류(黨類:같은 무리)를 형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인적교류를 억제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글씨 연마에 열중하였다.

해창위 오태주의 서체는 앞 시기에 유행하였던 석봉체, 송시열과 송준길의 양송체를 연마하고, 하사받은 조맹부체를 모범으로 삼아 유려하고 힘 있는 송설체를 구사하였다. 당시의 명필가로 청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해창위의 글씨는 많은 양이 전해 지지는 않으나 사후(死後)에 집자비문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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