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이후 안성초등교육의 실제
1950년 6.25전쟁이후 안성초등교육의 실제
  • 시사안성
  • 승인 2018.07.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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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3
졸업사진/1954년/14.2x10.3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
안성국민학교 제 44회 졸업사진이다. 이 사진은 안성초등학교 100년사(2003. 2)에 복사되어 있고 ‘근현대 안성인의 삶’(2003. 12. 30)과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 12)에 게재되어 있다(맨 앞줄 에 앉아있는 오른쪽에서 3번째는 전병록 담임선생님이고, 뒤에서 둘째 줄 학생으로 오른쪽에서 5번째가 필자이다)

1950년대는 6.25전쟁을 치루고 휴전 후의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이다. 교육현장의 실제를 살펴볼 때, 전쟁 중에는 전시교육 체제하에서 교육이 실시되고, 휴전 후에는 교육재건에 힘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기이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안성초등교육은 나름대로 꾸려 나갔고 휴전 후에는 교육재건에 힘쓰는 한편, 교육 안정과 발전을 위해 고심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는 이미 정부가 19491231일자로 교육법을 제정, 공포하여 초등교육기관으로 국민학교를 두도록 하고, 초등학교 교육목적과 교육목표 등을 규정한바 있다.

안성초등학교 100년사 기록에 의하면 19512월에 전시 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하여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각 급 학교의 수업을 재개토록 문교부 중요 시책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문교부는 1952423일자 대통령령 제 633호로 교육법시행령을 제정 공포하여 초등학교의 제도와 관련된 구체적 사항을 규정하였다.

정부는 교육법과 동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는 초등학교의 제도적 조치를 취하였다.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법 제 8)는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우선 수업연한은 6(교육법 제 95)으로 하고, 교과목은 국어, 사회생활, 산수, 자연, 보건, 음악, 미술, 실과로 정하였다.

취학연령은 만 6세부터 만 12세가 되는 날이 속하는 학년 말까지(법 제 96)로 하며 학년도는 41일부터 익년 331일까지로 하고 학기제는 1학기(41~930) 2학기(101일부터 331일까지)로 해서 수업일수 230일 이상으로 실시하도록 정하였다.

반장 임명장/1951년/17.5x26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4학년 2반 반장 임명장이다. 반장 임기는 1학기, 2학기 6개월씩 두 번에 나누어서 수여한 것으로 기억 된다. 인쇄양식은 등사용지에 굵은 글씨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제작하였다
반장 임명장/1951년/17.5x26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4학년 2반 반장 임명장이다. 반장 임기는 1학기, 2학기 6개월씩 두 번에 나누어서 수여한 것으로 기억 된다. 인쇄양식은 등사용지에 굵은 글씨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제작하였다

20032월에 발간된 안성초등학교 100년사에 따라 당시 안성국민학교 운영의 실제를 보면, 1949415일엔 제 3대 신응교(辛膺敎)교장이 부임하였고 학제는 문교부 방침에 따른 6-3-3-4제로 확정하고 개학일은 매년 41일을 학기 초로 정하였으며, 문교부장관이 각 급 학교의 공사립 명칭 사용을 폐지함에 따라 안성국민학교로 개명하게 되었다.

이후 교육의 내실화를 꾀하던 중 6.25전쟁으로 교육은 파행적 운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교육의 안정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급 학교는 임시휴교령과 함께 교육의 동면기에 들어가니, 안성국민학교도 어느 정도 교육적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시대였다.

1951630일 제 4대 홍종운(洪鍾運)교장이 부임하면서 부터 전쟁으로 훼손된 교사를 손질하고 보수함으로써 혼란기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경주하게 되었다. 또한 1952년에는 교육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한 교육자치제가 역사적인 발족을 하게 되어 시. 군 단위로 시행되는 본교도 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결과로 인하여 안성국민학교는 195191일 명 실 공히 26개 학급을 편성하여 운영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다.

1952년부터는 사친회(師親會)가 제도화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사친회는 6.25전쟁 직후 극도로 궁핍했던 국가 재정으로 교육 재원 확보가 어렵게 됨에 따라, 이 조직을 통해서 교원들의 생활 대책, 교사 건축, 학교 운영비 등 조달을 꾀할 목적으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안성국민학교에서도 학교와 가정간의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열악한 교육 재정 여건을 개선함으로써 교육 발전의 기반을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내실 있는 사친회의 운영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3년 3월 25일자로 발급된 안성국민학교 제 5학년 우등상장이다. 상장 양식은 인쇄소에 의뢰한 것인지 활자가 비교적 선명하다
상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3년 3월 25일자로 발급된 안성국민학교 제 5학년 우등상장이다. 상장 양식은 인쇄소에 의뢰한 것인지 활자가 비교적 선명하다

필자는 안성국민학교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난 나이 11살을 넘기면서 4학년 5학년 6학년을 경험하게 된다.

4학년 때인 19506. 25전쟁 후의 학교사정은 열악했고 사람 살기도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이다. 학교 건물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교실 바닥은 구멍이 숭숭 나있었고 책상, 걸상은커녕 칠판도 무슨 검은 색 회를 문질러 바른 상태여서 뭉툭한 백묵으로 쓴 글씨가 아동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교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려서 헌 공책에 몽당연필로 쓰자니 상당히 곤욕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어떤 애는 등에 지는 책가방을 가져와 무릎위에 올려놓고 필기하는 경우도 있었고, 더러 잘 사는 아동들은 앉은뱅이책상을 집에서 짜 와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애들은 그냥 바닥에 엎드려 쓰며 공부했다.

제일 재미있었던 시간은 청소시간이다. 지금 생각하니 청소시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청소시간이 되면 구멍 뚫린 교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멍 뚫린 교실 바닥사이로 팔을 집어넣어서 아이들이 빠트린 몽당연필이나 지우개를 어렵게 건져 올려 주인을 찾아주기도 하고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부자 집 아이들이 교실에서 구슬치기를 가지고 놀다가 구멍으로 굴러들어간 소구(유리구슬)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4학년 2반 학급임원/1951년/10x6.6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4학년 2반 학급 간부들이 박의원 담임선생님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찍은 모습이다(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필자이다. 선생님이 안고 있는 아들은 사)안성미래발전연구소 이사장 박상혁교수이다)
4학년 2반 학급임원/1951년/10x6.6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4학년 2반 학급 간부들이 박의원 담임선생님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찍은 모습이다(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필자이다. 선생님이 안고 있는 아들은 사)안성미래발전연구소 이사장 박상혁교수이다)

6. 25 이후이니까 모두가 어렵게 살았던 모양이다. 19514학년 2반 때의 일이다. 한 번은 반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읍내에서부터 미양면 구수리 까지 걸어가서 농사지으며 잘 사는 반 친구 유OO네 집에 가서 고추장과 김치를 얻어온 적이 있다. 우리 집 옥천동과 국민학교가 있는 구포동 사이에 위치한 동본동 안골목 박씨’(지금의 안일관광 뒤 쪽에 당시 99칸을 비롯한 큰 기와집에 박씨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의 통칭)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후손인 박의원(朴義遠)담임선생님이 살고 계시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자주 들리곤 하였다.

반장으로써 선생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멀리 가서 힘들게 얻어온 김치를 담임선생님께 갖다 드리니 껄껄 웃으시면서 김치를 찢어서 입에 쏙 넣어 맛있게 드시더니 도로 내주시며 어렵게 사는 아무개 집에 갖다 주라고 하신 기억이 난다.

19525학년 시절에 있었던 운동회가 생각난다.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서 벌이는 기마전에서 키 크다고 말을 태워 줬는데 나가자마자 쓰고 있던 청군 모자를 뺐기고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2살이나 위인 한 반 친구 박OO가 백군 대장이 되어 제일 먼저 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경쟁심에 웃음도 나고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운동은 싫어하는 탓으로 운동회가 돌아오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옥천동 임시정거장(일제 때 안성~장호원간 뜯긴 철로) 자리에 사는 우리 집 앞에는 나무로 만든 평행봉이 놓여 있었고 동네 형들이 모여서 역기도 들면서 운동하는 곳이라서 매일 매일 저녁나절엔 시끌시끌하였다.

부모님은 아들이 밖에 나가서 같이 운동하기를 바랐지만 나가지 않았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도 그냥 책상에 앉아서 밤늦게까지 공부 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소리 중에서 이제 공부 그만하고 불 끄고 자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다. 등잔 불 켜 놓고 공부하다가 그만 깜빡 조는 바람에 이마 위의 머리를 등잔불에 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휴일엔 동네 냇갈(안성천) 둑에 한 20여명의 꼬마 장정들을 모아서 목총을 들고 전쟁 연습시키는 장소에도 뱃장이 없어서인지 나가보지도 못했다.

다만 소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노래는 바로 집 뒤에서 큰 소리로 불러댔기 때문에 방 뒤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거의 부를 수가 있었다.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3년 4월 1일 안성국민학교장(홍종운) 명의로 발급된 6학년 1반 1학기 반장 임명장이다. 임명장은 등사용지에 글씨를 긁어서 등사판에 밀어 제작하였다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3년 4월 1일 안성국민학교장(홍종운) 명의로 발급된 6학년 1반 1학기 반장 임명장이다. 임명장은 등사용지에 글씨를 긁어서 등사판에 밀어 제작하였다

좀 더 성장해서 19536학년 때에는 매 주 월요일만 되면 모든 선생님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반드시 애국조회를 거행하였다. 음악선생님이신 현점득 선생님은 같은 반 친구 박OO에게 애국가 지휘를 하도록 시킨 것이 샘이 났다.

필자는 전교 어린이회장이 읽게 되어있는 우리의 맹세를 매번 단상 앞으로 나가 선창하곤 하였다. 물론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하기위해 등단하실 때엔, “전교생 전체 차려~경례를 목청 있는 대로 뽑아서 구령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맹세19497월에 문교부에서 제정하였다고 한다. 제정하게 된 경위를 기록에서 찾아보면 1948년 남쪽과 북쪽에 각기 정권이 세워졌다. 남쪽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이념으로 반공을 내세우고 통일의 방안은 무력을 동원한 북진통일을 내세웠다.

정부는 이러한 이념을 국민들의 정신 속에 주입시키기 위해서 지난 날 일제 강점기 동안 모든 행사에서 강요받았던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맹세하는 말)를 모방한 우리의 맹세를 만들었다고 한다.

6학년 시절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마다 뜻도 모르고 달달 외어서 힘차게 선창했던 우리의 맹세는 지금도 생각난다(“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이 문장은 학교행사에서 선창, 복창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서적 뒤에 빠짐없이 인쇄되어 있었고 당시 각 급 학교 학생들은 모두 암기해야만 했다. 우리의 맹세는 19604. 19혁명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폐지되었다.

졸업증서/1954년/38.8x27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류시형 교장 명의로 발급된 졸업장이다. 이 졸업증서는 안성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百年史(2003. 2) 사진첩에 게재되어 있고, 안성맞춤박물관 기증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 12) 박종권 편(p.p 27~36)에도 게재되어있다
졸업증서/1954년/38.8x27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안성국민학교 류시형 교장 명의로 발급된 졸업장이다. 이 졸업증서는 안성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百年史(2003. 2) 사진첩에 게재되어 있고, 안성맞춤박물관 기증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 12) 박종권 편(p.p 27~36)에도 게재되어있다

필자는 19543236년간의 추억어린 초등학교 전 과정을 마치고 당시 류시형(柳時衡)교장선생님(안성초등학교 제 6대 교장) 명의의 영예로운 졸업증서를 받았다. 졸업증서의 번호는 제4444호이다. 44회 졸업생 중 학급번호가 44번인가 보다. 본적 란엔 충청남도로 되어있다. 당시 호적법상 본적지는 부모를 따라가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조부의 본적지가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신대리 41번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난 514일자 박종권의 사담기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1886년 병인년에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가 수그러들 무렵 조부(박재경)는 충남 보령에서 다 성장한 아들(필자의 부친)을 데리고 옹기점 따라 일하러 충북 진천에 갔었다는 부모의 전언을 거론한 바 있다.

진천 삼박골 교우촌에서 자란 모친(최소저/당시 17)을 며느리 삼아 청주 공주 등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해방 무렵 안성에 오시어 늦은 손자(박종권)를 보게 되었다. 지금 동사무소에서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호적상 본적지는 경기도 안성시 옥천동 12번지로 되어있다.

제시한 안성초등학교 제44회 졸업사진에 (1)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반별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졸업생 통계에 보니 44회 졸업생 총 수는 246명이었다. 그리고 6학년 1(담임 전병록 선생님) 학급인원은 57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6학년 학급 수는 4학급인 것으로 확인된다.

사진에 나타난 모습을 보니 선생님들이 졸업하는 학생들을 가운데 세우고 마치 호위하듯이 사방으로 둘러서서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선생님들이 우리들을 엄청 사랑하셨나보다. 다시 한 번 추억에 어려서 졸업사진에 있는 선생님 수를 세어보니 모두 25명이다. 교장 교감 두 분을 제외하면 선생님 숫자가 23(12, 11)이다. 필자는 199544회 동창회장으로 있을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들을 수소문하여 모교(당시 장동원 교장) 강당에 모시고 사은회 행사를 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부터 64년 전인 1954년 졸업식장에서 어린 제자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신 1반 전병록 담임선생님을 비롯하여 류치형 선생님, 공태호 선생님, 신현복()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1학년 3반과 2학년 3반 담임이신 박용찬 선생님, 3학년 2반과 4학년 2반 담임이신 박의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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