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에서도 토지조사에 착수 - 매일신보 1911년 11월과 12월 기사
안성에서도 토지조사에 착수 - 매일신보 1911년 11월과 12월 기사
  • 시사안성
  • 승인 2018.07.1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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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12

1911111933全道恩賜紀念

작년도에 은사금을 배수(拜受)한 각군의 사업을 거한즉...(중략).. 양성군에는 기념계(紀念契)를 준비중이라 하며,...(하략)

 

은사금에 대해서는 이 연재기사에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본지 201863일기사 참고)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후 민심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은사금은 말 그대로 은혜로운 하사금이라는 뜻인데 일본 왕(당시용어로 천황)이 준 은혜로운 돈이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짜는 없는 법이고, 이런 은사금을 받을 정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리 없고, 몰랐다 해도 일제가 모르는 상태로 놔뒀을 리 없다.

일제가 그 돈을 준 이유는 일본에 충성하는 조선인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사금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앞에서 양지군의 경우 잠업전습소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본지 2018624일 기사 참고) 양성군에서는 기념계를 만들 것을 준비중임을 알 수 있고 각지에서 나름대로 은사금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제가 주는 돈은 공짜인 듯 공짜가 아니었다.

 

191112324단 토지조사현상

임시토지조사국에서는 목하 300명의 조사원을 5반으로 분하야 각도의 소유권 조사에 종사중인대 기위(旣爲) 기(其) 조사를 종료한 자는 경기도 부평, 양천, 김포, 통진, 강화, 교동, 시흥, 과천, 안산, 인천, 경상북도 대구의 각부군이오, 내년 3월내로 완료할 자는 경기도 광주, 남양, 수원, 진위, 양성, 안성, 죽산, 양지, 용인 급 경상북도 경산, 고령, 현풍, 청도의 각 군이오. 12월에 비로소 준비조사에 착수한 자는 .....(중략).... 각군인대 차등은 준비조사 착수후 3개월이면 소유권 조사에 이(移)할 터이오, 3개월을 경(經)하면 측량 종사 터이라 하며, 상(尙) 차(且) 경성부의 토지조사에 대하야는...(중략)...

 

일제가 만든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토지의 소유권을 조사중인데 안성, 양성, 죽산, 양지 등 현재의 안성지역은 19123월까지 종료할 계획이라는 기사다. 기사에 의하면 조유권 조사후 3개월이 지나면 측량을 할 계획이다.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이루어지는데 학계에서는 그 목적을 등기제도 등 토지소유의 증명제도(證明制度) 확립, 조세수입 체제 확립, 국유지 창출, 광범위한 미개간지 무상 점유, 일본상업고리대자본의 토지점유 합법화, 광범위한 국유지 창출을 통한 일본이민자에게 불하할 토지 확보, 일본으로의 미곡수출 방법 확보 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전문적인 논의가 아니더라도 새롭게 식민지를 확보한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식민지의 경제를 재편하리라는 것은 상식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학자들의 지적처럼 토지조사후 일본인들이 조선에 이주하게 되는데 앞으로의 신문기사를 보면 안성에서도 그렇게 이주해 온 일본인들과 관련된 기사가 종종 등장한다. 그 때 소개할 계획이다.

 

1911122031總督府公文: 告示, 조선총독부 제371

명치 44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 289, 1항중 좌와 같이 추가하야 1221일부터 시행함. 명치 441216

-노량진-안성간

1통화시의 통화료 금 35

1회의 전화 호출료 금 15

 

당시의 신문에서는 때로 관보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인사(人事)와 관련된 내용이나 공공요금 등에 관한 기사가 그 대상이다. 앞으로의 기사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19111220일자 기사에는 안성과 노량진간의 전화요금이 고시된 것을 그대로 게재하고 있는데 통화료가 35전이다. 당시 물가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쌀 한 섬에 15원 정도 했던 것으로 파악되어 전화 1통화에 35전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언뜻 계산해도 전화 50통을 하면 쌀 한 섬 가격이기 때문이다.

김태영 선생이 쓴 안성기략”(1925)에 의하면 안성에는 1910416일에 전신업무를 개시했고, 1923626일부터 시내전화 교환업무를 시작했다. 19104월의 전신업무 개시가 시외전화 개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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